실험실에서 질병과 관련된 단백질을 강력하게 억제하는 물질을 발견했다고 해서 곧바로 좋은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몸속에 들어간 뒤 몇 분이나 몇 시간 만에 대부분 사라져버린다면 충분한 치료 효과를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너무 오래 남아 축적된다면 부작용이 문제가 될 수 있다. 신약 개발에서 약물이 몸에 얼마나 오래 머무는지를 나타내는 ‘반감기’가 중요한 이유다.
약물의 반감기는 체내 약물 농도가 절반 수준으로 감소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일정한 조건에서 혈중 약물 농도가 100에서 50으로 감소하는 데 6시간이 걸린다면 대략적인 반감기를 6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다.
약이 몸에서 사라지는 과정에는 여러 기관이 관여한다. 간에서는 다양한 효소가 약물을 다른 형태로 바꾸고 신장은 약물이나 대사산물을 소변으로 배출한다. 일부 성분은 담즙 등을 통해 제거되기도 한다.
약물의 크기와 구조, 지방이나 물에 녹는 특성, 혈액 속 단백질과 결합하는 정도 등에 따라서도 체내 지속시간이 달라질 수 있다.
반감기가 짧은 약은 필요한 혈중 농도를 유지하기 위해 하루에 여러 번 복용해야 할 수 있다.
아침에 약을 먹었을 때 농도가 빠르게 올라갔다가 몇 시간 만에 크게 떨어진다면 다음 복용 전까지 약효가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한 번 투여한 약이 오랫동안 유지된다면 복용 횟수를 줄일 수 있다. 하루 세 번 먹던 약을 하루 한 번으로 줄이거나 매일 사용하던 치료제를 일주일 간격으로 투여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최근 신약 개발에서는 치료 성분 자체뿐 아니라 체내 지속시간을 조절하는 기술이 함께 중요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는 약물이 혈액 속 단백질과 결합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혈액에는 알부민이라는 단백질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일부 약물은 알부민과 결합하면 신장에서 빠르게 걸러지는 것을 줄이고 체내에 더 오래 머물 수 있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특성을 의도적으로 이용한다. 약물 분자에 지방산과 같은 구조를 붙여 알부민과 결합하는 정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일부 펩타이드 의약품에서 이러한 기술을 찾아볼 수 있다.
작은 펩타이드는 체내에서 빠르게 분해되거나 신장을 통해 제거될 수 있다. 하지만 구조를 변형해 혈액 속에서 오래 유지되도록 하면 투여 간격을 크게 늘릴 가능성이 생긴다.
분자의 크기를 키우는 방법도 있다.
신장은 혈액을 여과하면서 작은 물질을 비교적 쉽게 제거한다. 따라서 약물의 크기를 일정 수준 이상으로 증가시키면 신장을 통한 빠른 제거를 줄일 수 있다.
단백질 의약품에 특정 고분자를 연결하거나 다른 단백질 구조와 결합하는 기술이 사용되는 이유다.
항체가 상대적으로 긴 반감기를 갖는 데에는 특별한 재활용 시스템도 관여한다.
일부 항체는 세포 내부로 들어간 뒤 그대로 분해되지 않고 특정 수용체와 결합해 다시 혈액으로 돌아올 수 있다. 이 과정에는 FcRn이라는 수용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연구자들은 항체의 Fc 부위를 조절해 FcRn과의 상호작용을 변화시키고 체내 지속시간을 늘리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 기술이 발전하면 몇 주 간격으로 투여하던 항체 치료제를 더 긴 간격으로 사용할 가능성도 생긴다.
하지만 반감기가 길다고 항상 좋은 약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약물 투여 후 심각한 이상반응이 발생했을 때 체내에서 약물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다면 부작용 역시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용량을 잘못 투여했을 때 조절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매일 복용하는 약은 다음 복용을 중단할 수 있지만 몇 달 동안 작용하도록 설계된 치료제는 한번 투여한 뒤 즉시 제거하기 어렵다.
따라서 장기지속형 신약에서는 첫 투여 전에 환자의 상태를 더욱 세밀하게 평가해야 할 수 있다.
약물이 체내에 축적되는지도 중요하다.
반감기가 긴 약을 너무 짧은 간격으로 반복 투여하면 이전에 투여한 약이 충분히 제거되기 전에 새로운 약이 들어오면서 혈중 농도가 점차 높아질 수 있다.
이를 고려해 적절한 투여 간격과 용량을 설정해야 한다.
반감기와 약효 지속시간이 항상 같은 것도 아니다.
혈액 속 약물 농도가 낮아져도 이미 표적 단백질에 강하게 결합했거나 세포 내부에서 오래 지속되는 변화를 일으켰다면 약효가 더 오래 이어질 수 있다.
반대로 혈액에는 약물이 남아 있더라도 실제 치료가 필요한 조직에 충분한 농도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대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신약 개발에서는 단순히 혈액 속 농도만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약물이 어느 조직에 얼마나 분포하는지와 실제 생물학적 효과가 얼마나 지속되는지를 함께 확인한다.
개인마다 반감기가 달라질 가능성도 있다.
간과 신장 기능이 저하돼 있으면 일부 약물이 몸에서 제거되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 연령과 체중, 다른 약과의 상호작용 등도 약물의 체내 농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같은 용량을 모든 사람에게 투여하더라도 실제 약물 노출량이 완전히 같지 않은 이유다.
유전적인 차이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약물을 분해하는 특정 효소의 활성이 사람마다 다르면 어떤 사람에게서는 약물이 빠르게 사라지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오래 남을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정밀 약물치료 연구와도 연결된다.
신약 개발 과정에서는 후보물질의 효과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체내에서 지나치게 빨리 분해된다면 구조를 다시 수정하는 경우가 있다.
분해되기 쉬운 위치를 화학적으로 바꾸거나 간 효소의 영향을 덜 받도록 분자 구조를 조정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지나치게 오래 남거나 특정 장기에 축적되는 후보물질은 안전성 문제 때문에 개발이 어려워질 수 있다.
결국 좋은 신약은 가장 오래 남는 약도, 가장 빨리 사라지는 약도 아니다.
치료에 필요한 시간 동안 충분한 농도를 유지한 뒤 적절한 속도로 몸에서 제거되는 약이 이상적이다.
최근 장기지속형 주사와 항체, 펩타이드 치료제가 발전하면서 신약 개발 경쟁은 단순한 약효 비교를 넘어 ‘한 번 투여한 약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오래 작용하게 할 것인가’로 확대되고 있다.
몇 시간마다 약을 챙기던 치료를 하루 한 번으로, 매일 사용하던 치료제를 일주일이나 한 달에 한 번으로 바꾸는 변화 뒤에는 반감기를 조절하는 정교한 기술이 존재한다. 약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는지만큼 몸속에서 언제까지 머물고 언제 사라지는지를 설계하는 것 역시 현대 신약 개발의 핵심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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