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특별한 문제가 없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주변이 빙빙 도는 듯한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어지럽고 몸을 일으키면 중심을 잡기 어려우며 메스꺼움과 구토까지 이어질 수 있다. 이런 증상이 수시간이 아니라 며칠 동안 계속된다면 전정신경염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전정신경염은 귀 안쪽의 평형기관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뇌로 전달하는 전정신경의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는 질환이다. 청력보다는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기능에 주로 영향을 준다.
사람이 똑바로 서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으로 보는 정보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내이에 있는 전정기관과 근육·관절에서 들어오는 감각정보가 함께 뇌로 전달되고, 뇌가 이를 종합해 몸의 위치를 계속 조절한다.
전정기관은 양쪽 귀에 하나씩 존재한다. 평소에는 양쪽에서 전달되는 신호가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머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뇌도 몸이 정지해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한쪽 전정신경의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면 양쪽 신호의 균형이 무너진다.
실제로는 가만히 있는데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반대쪽 귀에서 상대적으로 더 강한 신호가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뇌는 이를 몸이나 주변 환경이 움직이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 있다.
그 결과 강한 회전성 어지럼증이 발생한다. 눈이 일정한 방향으로 반복해서 움직이는 안진도 나타날 수 있다.
전정신경염의 정확한 원인은 모든 환자에서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 감염이나 감염 이후의 염증반응 등이 가능한 원인으로 거론된다.
일부 환자는 감기와 비슷한 증상을 겪은 뒤 어지럼증이 시작됐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감기에 걸렸다고 반드시 전정신경염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전정신경염의 가장 큰 특징은 어지럼증이 비교적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다.
이석증에서는 특정 방향으로 고개를 움직였을 때 짧고 강한 어지럼증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전정신경염에서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심한 어지럼증이 가만히 있어도 지속될 수 있다.
첫날이나 초기 며칠 동안 증상이 특히 심한 경우가 많다. 머리를 움직이면 어지럼증이 더욱 심해질 수 있지만 특정 자세에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메스꺼움과 구토도 흔하게 동반된다.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기 어려울 정도로 구토가 심하면 탈수가 발생할 수도 있다.
걷는 것도 어려워질 수 있다. 몸이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을 받거나 벽을 잡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렇다고 전정신경염이 발생하면 평생 심한 어지럼증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상된 전정기능이 일부 회복될 수 있고 뇌 역시 달라진 양쪽 귀의 신호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이를 전정 보상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양쪽 귀의 신호 차이를 심각한 오류로 받아들이던 뇌가 점차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면서 어지럼증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심한 회전성 어지럼증은 며칠 사이 상당히 완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고개를 빠르게 움직이거나 걸을 때 순간적인 불안정감이 한동안 남을 수 있다.
전정신경염에서는 일반적으로 뚜렷한 청력 저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도 중요한 특징이다.
갑작스러운 청력 감소나 심한 이명이 함께 발생했다면 돌발성난청이나 내이의 다른 질환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전정신경과 가까운 달팽이관 기능까지 영향을 받은 경우에는 다른 진단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청력 증상 여부를 확인한다.
전정신경염 진단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뇌졸중과의 구분이다.
소뇌나 뇌간에 뇌경색이 발생해도 갑작스러운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 균형장애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느끼는 증상만으로는 전정신경염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
따라서 갑작스럽고 지속적인 어지럼증이 나타났다면 눈의 움직임과 균형 상태, 신경학적 증상 등을 함께 평가한다.
팔다리 힘이 빠지거나 감각이 이상해지고 말이 어눌해지는 증상이 동반된다면 중추신경계 질환 가능성을 더욱 주의해야 한다.
갑작스러운 심한 두통이나 복시, 얼굴의 감각 이상 등이 함께 나타나는 경우에도 단순한 귀 문제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제대로 서거나 걷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의 심한 균형장애가 지속된다면 원인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필요한 경우 뇌 영상검사 등을 시행해 다른 질환이 없는지 확인한다. 모든 어지럼증 환자가 같은 검사를 받는 것은 아니며 증상과 신경학적 검사 결과, 위험요인 등에 따라 검사 방법이 결정된다.
전정신경염의 급성기에는 심한 어지럼증과 구토를 줄이기 위한 약물이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어지럼증을 억제하는 약을 장기간 사용하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일부 약물은 뇌가 새로운 전정 신호에 적응하는 과정을 늦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급성기의 심한 증상이 지나간 뒤에는 가능한 범위에서 몸과 머리를 움직이며 균형기능을 다시 훈련하는 과정이 중요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전정재활운동을 시행하기도 한다. 눈과 머리, 몸을 반복적으로 움직이면서 뇌가 변화된 감각정보를 다시 처리하도록 돕는 방법이다.
처음 운동할 때는 일시적으로 어지럼증이 증가할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수준의 반복적인 움직임은 전정 보상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환자가 심한 어지럼증을 경험한 뒤 계속 누워서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많다. 급성기에는 휴식이 필요하지만 증상이 어느 정도 안정된 뒤에도 움직임을 지나치게 피하면 회복 과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전정신경염이 호전된 뒤 이석증이 뒤따라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의 지속적인 어지럼증은 좋아졌는데 이후 침대에서 돌아누울 때마다 짧게 빙빙 도는 증상이 생긴다면 새로운 형태의 어지럼증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전정신경염은 이석증이나 메니에르병처럼 같은 ‘귀에서 시작되는 어지럼증’에 포함될 수 있지만 증상이 나타나는 방식은 상당히 다르다.
이석증은 특정 자세에서 짧게 반복되는 경우가 대표적이고, 메니에르병은 청력 변화와 이명 등을 동반한 반복적인 발작이 특징적이다. 전정신경염은 뚜렷한 청력 저하 없이 갑작스럽고 강한 어지럼증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양상이 전형적이다.
갑자기 시작된 심한 어지럼증이 하루 이상 계속된다고 해서 무조건 전정신경염이라고 스스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특히 처음 경험하는 심한 지속성 어지럼증이라면 귀의 평형기관 문제인지 뇌에서 발생한 문제인지 구분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전정신경염은 한쪽 귀의 균형 신호가 갑자기 약해지면서 시작되지만 회복에는 귀뿐 아니라 뇌의 적응 능력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초기의 강한 회전감이 줄어든 뒤에도 움직일 때 불안정한 느낌이 남을 수 있는 만큼 증상의 단계에 맞춰 적절한 평가와 재활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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